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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내손으로 찍어야 하는 사진

정말 찍고 싶지 않은데 꼭 내손으로 찍어야 하는 사진이다. 동료이고 친구이면서 형인 사람의 영정사진. 고식적 항암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평균 생존기간은 2.5년. 그 좋던 풍채가 나보다 겨우 1kg 많이 나가게 줄었는데, 그 마른 얼굴을 보면서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미리 연습하지 못 해서, 생각만 거듭하다가 앞에 등장한 그 얼굴 앞에서 대충 아무 말이나 내뱉으며 태연한 척 했지만, 그 어색함을 그는 알겠지. 우리, 제법 오래 봤으니까.

 

그나마 오늘은 컨디션이 낫다는 그이지만 오래 앉혀둘 수 없고, 준비 못한 말만큼이나 각오없이 카메라를 든 나는 사진이 참 어려웠다. 나의 친구, 형, 동료에게 어떤 사진을 주어야하나. 그가 없는 자리에 그 대신 놓일 사진에 나는 어떤 표정을 담아주어야 하나. 어떤 사진도 모자를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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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도 쓸 데가 없어서.

나는 살면서 어떤 상황, 어떤 사람 앞에서 한 번도 충분한 사람이었던 적이 없었다. 단정할 수 없지만, 기억하기에는. 나는 항상 서툴고 부족한 사람이었고 조마조마하며 애쓰며 그 부족함을 겨우겨우 메우며 또는 감추거나 외면하며 이제껏 살았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지치지만, 지친다고 어떻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지치고 만다. 그럴 때는 유난스럽게 겨울나무가 부럽다. 이번 생은 베렸어.라고 문장 한 줄을 툭, 던져놓던 시인도 자꾸 생각난다. 버린 생을 한 해마다 깔끔하게 털어내고, 새로운 생을 살아볼 각오와 기대를 갖는 겨울 나무. 작업실과 사진관에, 창고와 집에 겹겹으로 쌓여서 몇 년째 한 번 열어보지도 않는 많은 것들. 저것들조차 털어내지 못 하면서.

 

출장에서 복귀한 후 밀린 일과 팬션 일로 날마다 마감을 쳐내고 있다. 덕분에 다녀온 후 브라질 기록은 한 줄도, 한 장도 열어보지 못 했다. 일 잘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일도 발 앞에 낙엽을 쓸듯 가볍게 해내던데, 나는 한 개 한 개가 깊은 뿌리를 내린 나무둥치를 걷어차는 것 같아서.

 

이런 내게 어울리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크기를 생각했다. 서너 평 남짓 작고 텅빈 공간. 그 정도가 내가 잘 관리하며 쓸 수 있는 최대치가 아닐까.

 

어디도 쓸 데가 없어서.

여기라도 있어서 다행이지. 별로 드러내고 싶지 않지만 누군가에게 가 닿을 수도 있다는 작은 기대가 있다.

뱉어낼 수 있는 생각 중에서 가장 바닥에 있는 생각들을 여기에는 적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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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광이 지나갔다.

새 사진수업을 시작한 것이 이제 일주일 됐다. 사진에 애정이 많은 분들이라 눈빛이 반짝거리고 옆에서 누가 툭 건드려주기만 해도 모아놓은 사진들이 온몸에서 툭툭 떨어져 내릴 것 같다. 덕분에 나도 조금 더 자극받고, 일방적인 수업이 아니라 함께 하는 프로젝트라고 생각하고 같이 달려보겠노라 다짐을 한다.

 

첫 번째 숙제로 나간 것은 빛. 다음 수업까지 우리는 매일 빛을 찍어 공유하기로 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나는 거의 매일 사진관과 정원, 팬션 안에서 어슬렁거리며 어디 쓸만한 빛 없나 뒤적거린다. 동네 장날 반쯤 늘어진 옷과 곧 떨어질 것 같은 슬리퍼로 장터 외곽을 두리번거리는 사람처럼.

 

빛은 도처에 있는데 하루이틀 찍고 나면 인상적인 빛은 그 광채를 잃는다. 어느새 무난하고 익숙해져버린 빛. 아, 어떻게 하면 남은 일주일 동안 지루하지 않은, 갓 딴 초당옥수수 수염냄새 같은 빛을 건질 수 있을까. 고민은 얕고 카메라는 멀다. 카메라보다 공구 들어야 할 시간이지.

 

대출이 나왔다. 오래 걸려서 그 동안 미뤄둔 것이 많고 또 신세 진 곳이 많다. 

대출이 승인되었습니다. 이 한 줄 문자가 어찌나 반가운지. 마음이 턱 놓인다. 이보다 더한 빛이 최근 내 일상에 있었었나?

 

오후 네 시에 내 통장에 입금된 대출금은 불과 한 시간 사이에 사방으로 찢어져서 다시 쏘아져 나갔다. 

뭐지? 나에게 빛이 비춘 것 아니었나?

주변이 일순간 빛으로 눈멀었다가 다시 돌아온 느낌.

 

이번 빛은 섬광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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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분하지 않겠다.

통분하지 않겠다.

 

마루야. 너는 한참 분수를 배우는 중이다. 요즘 무렵에는 최대공약수와 최소공배수를 배우더구나. 왜 그 순서인가 했더니, 최소공배수 다음에는 그를 응용한 통분을 배우는 구나. 서로 다른 분자의 크기를 비교하기 위해 우선 분모를 같은 크기로 만든다. 듣고 보면 꽤 깔끔해서 아름답기까지 하다.

 

오늘 아빠는 운전 중에 불현듯 생각했다. 내 주변의 상황이 바뀌어서 지금의 나를 이루는 것들 중에 하나씩 둘씩 내려놓아야 한다면 무엇부터 그만 두게 될까. 그리고 나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마지노선은 어디까지일까. 그러다가 지금 아빠가 하고 있는 여러 가지의 가치를 따져보려고 시도하다가 멈췄다. 여러 가지의 가치를 따지기 위해서는 하나의 기준이 필요할 텐데, 제일 먼저 떠오른 기준은 돈이었다. 내 한 시간은 얼마쯤의 돈일까? 내 취미는? 내 작업은? 그리고 내 산책은 또 얼마쯤일까? 돈이라는 분모로 통분해보려다가 깜짝 놀란다.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공통분모로 삼을 만한 다른 것들을 몇 개 떠올려보다가 관둔다. 마루야, 네게 자신있게 통분을 설명하던 아빠를 반성한다. 언제나 답이 있는 수학문제처럼 세상을 살라고 너에게 말하지 않아야겠다. 그런 경험이 반복되면 세상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공통분모를 찾으려고 애쓰고, 스스로 찾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분모로 주변 모든 분자의 크기를 줄세우게 될까 무섭다.

 

마루야. 세상에는 통분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공통분모는 없을 때가 부지기수다. 그렇다고 틀렸다는 빗금을 긋지 말자.

통분하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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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션 허가가 났다.

팬션 허가가 났다. 공사 1년만에 드디어. 지하철에 앉아서 내내 편션에 비치해둘 책자 내용을 다듬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팬션주인으로 사는 인생을 생각해본적 없다. 처음 사진을 각오하고 상하이에 갔을 때, 깨어있는 시간 동안은 온종일 사진만 생각했다.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리지 않았다. 현지 대학원에서 학위공부를 하는 한국유학생들과 함께 공부할 때도 나는 단지 사진에 도움이 된다는 마음으로 함께 스터디했다. 나중에 아내는 왜 그때 학위를 안 땄냐고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제주에 와서 사진관을 연 뒤에도 언제나 사진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각오가 있었다. 그러기를 8년,
이제 새로운 사업자등록증을 판다. 그동안은 타협의 시간이었을까. 현실을 배우고 받아들이는 시간이었을까. 나쁘다고 만은 할 수 없다. 결론지을 수 없는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서 이제는 이 순간을 패배나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게 됐다. 

이왕 하는 거, 잘 되면 좋겠다. 그 ‘잘’에는 물론 경제적인 성과가 가장 기본조건이겠지만 그러나, 재미있으면 좋겠다. 그래야 지치지 않고 게스트와 더불어 진심으로 잘 놀 수 있을 것 같다. 새로운 놀이터를 준비하는 심정으로, 팬션에 새 이불을 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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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지금처럼.

 

사주를 봤다. 촬영프로그램에 참여해서 오신 분 중에 명리공부를 하는 분이 계셨다. 사진관에서의 내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고, 사주를 좀 봐주겠다고 하셨다. 내가 태어난 시각은 도둑맞은 어머니의 수첩과 함께 사라졌으니까 생일만 말씀드렸다.

 

한참을 살펴보시고 이런저런 상황과 대조해가며 그 분은 내가 태어난 시각이 아침 7:50분에서 조금 뒤까지. 그 사이쯤일 거라고 추리해 주셨다. 여러 이야기들을 해주셨고 대충 언제쯤부터 대충 어떻게 될 거라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다음날 길을 걷다가 문득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나는 그때를 대비해서 뭘 어떻게 할까? 자문했다. 대답은 지금처럼.

아, 나는 그렇게 살고 있었구나. 어느새.

 

'다시 태어나도 이 생을 반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살아야 한다던 철학자의 말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때는 도저히 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처럼. 

좋네. 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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